시조동상




시조동상건립취지문

시조 신숭겸 동상조감도

의기(義旗)를 들어 고려(高麗)를 개국(開國)하시었고 순절(殉節)로 국권(國權)을 수호(守護)하시어 고려통일(高麗統一)의 위업(偉業)을 이룩하신 시조(始祖) 장절공(壯節公)께서는 두상(頭像)을 잃으신채 예장(禮裝)을 치르시었 으니 영전(靈前)에 설 때마다 통탄(痛歎)을 금(禁)할 수 없고, 원래(元來) 태백산성(太白山城)에 태조(太祖)께서 장절공(壯節公)과 충절(忠節) 유공(庾公), 무공(武恭) 복공(卜公) 등(等)의 동상(銅像)을 주조(鑄造)하여 봉안(奉安)하고 이 곳에 사우(祠宇)를세워 3태사(太師)를 배향(配享)하였으며 사호(祠號)를 상충(尙忠)이라 하였으나 임진(壬辰), 정유(丁酉) 병란(丙亂)에 소실(消失)되었고 동상(銅像)은 광복후 총파(銃破)되었으니 또 한번 비통(悲痛)한 노릇이다. 춘천묘역(春川墓域), 대구(大邱) 표충재(表忠齋), 곡성(谷城) 용산단(龍山壇) 등(等) 시조(始祖) 3대(大) 유적지(遺跡地)는 천년(千年)의 유서(由緖)깊은 사적지(史蹟地)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위왕대사(爲王代死)하시어 의절(義節)의 표상(表象)이 되신 위대(偉大)한 시조(始祖)의 영령(英靈)을 모신 성역(聖域)이니 한고조(漢高祖)가 영양(榮陽)에서 정우(頂羽)에게 죽게 되자 장군기신(將軍紀信)이 위장대사(僞裝代死)하여 한고조(漢高祖)를 구명(求命)한 동문일사(東問一死)의 고사(古事)와 더불어 인류역사(人類歷史)에 길이 빛날 사적지(史跡地)다.

따라서 우리 70만(萬) 현손(現孫)들은 시조(始祖) 장절공(將節公)의 위훈(偉勳)을 더욱 빛내고 선조(先祖)의 사적(事蹟)을 엄숙(嚴肅)히 수호(守護), 보존(保存), 발전(發展)시켜야 할 의무(義務)가 있을진대 국가예산(國家豫算)에 의(依)하여 3대(大) 유적지(遺跡地)가 본격적(本格的)으로 성역화사업(聖域化事業)이 추진(推進)되고 있으며 국내외(國內外)를 막론(莫論)한 수(數)많은 관광객(觀光客)이 증가일로(增加一路)에 있을 뿐 아니라 국민교육(國民敎育)의 도장(道場)이 되고 있는 실정(實精)인바 우리 후손(後孫)들은 정성(精誠)을 모아 3대(大) 유적지(遺跡地)에 3기(基) 동상(銅像)을 준엄(尊嚴)하게 봉안(奉安)하여 위령(慰靈)의 제단(祭壇)으로 모시어 추모(追慕)의 예(禮)를 올리고 숭고(崇高)한 대의대절(大義大節)의 정신(精神)을 영세(永世)토록 계승(繼承)하고자 함.

시조동상설계도해설

시조 동상 설계도

시조(始祖) 동상(銅像)은 장군(將軍) 입상(立像)으로상신고(像身高)는 3,800㎜, 폭(幅)은 2,050㎜이며 "영정(影幀)"을 토대로 한 것인 바, 영정은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공양왕(恭讓王, 고려34대(마지막)왕)에 성조보공배홍신(聖祖報功裵洪申) 복유최육공원형(卜庾崔六公圖形) 대어여정대묘춘추불특(對御與亭大廟春秋不忒)이라 하였으니 태조(太祖) 어진(御眞)과 같이 대묘(大廟)에 영정이 봉안되었었고, 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역대(歷代) 왕조실록(王朝實錄), 고려조편(高麗朝編)에 역대 왕의 어진(御眞)과 더불어 위인편(偉人編)에 영인본(影印本)이 등재되어 국사자료(國史資料)로 공인, 전래된 것이며,
또한 원래 장절공(將節公) 영정(影禎) 진본(眞本)이 순절지(殉節地)인 대구(大邱) 공산(公山)에 태조께서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봉안,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그후 대비사(大悲寺)로 옮겨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바 있음,
현(現) 장절공(將節公) 영정(影幀)은 상기 자료와 더불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최영희(崔永禧)박사의 고증과 일본국 국학원대학(國學院大學) 고고학박물관 소장 자료 "갑주(甲胄)"등을 근거로 한 것인 바, 이 "갑주(甲胄)"는 일본 구주(九州)에서 출토된 것으로, 고려 원종 15년에 여원(麗元)연합군이 일본정벌 시 고려 장군의 갑주(甲胄)와 복식(服飾)이었던 것임
뿐만 아니라 장절공(將節公) 상(像) 원래 황해도 태백산성에, 태조께서 장절공(將節公)과 충절공(忠節公)유근필 장군(庾黔弼 將軍), 무공공(武恭公) 복지겸 장군(卜智謙 將軍) 등 삼태사(三太師)의 동상(銅像)을 주조하여 봉안하여 오다가 광복 후 총파(銃破)되었으니, 현재 생존한 후손들이 그 용상(容像)을 역력히 알고 있어 어김없이 고증한 것임.

●좌대(座臺-3,780 * 2,100 * 2,100))
좌대는 장군님상이므로 성곽을 상징하여 축단하였으며, 12간지를 상징한 12단을 쌓아 영영세세 영원할 것을 기원하고, 한 단 높이를 춘정대제일(春亭大祭日)인 3월 3일을 상징한 330㎜로 하였고, 상판고는 순절년도인 927년을 상징하여 270㎜로 하였다.

●기단(基壇-510 * 3,960 * 2,310)
분향(焚香)을 엄숙하게 하기 위하여 중앙에 신도를 두고 좌우에 상계·하계를 두고 상석을 놓아 헌화 또는 헌주하며, 향로(香 爐)를 놓아 분향(焚香)을 하도록 하였음.

●부조(浮彫-1,320 * 2,640)
부조(浮彫)는 전면에 충렬도·사안도·해설문, 후면에 약전(略傳) 도이장가·건립문·헌성록을 설치한 것임.

●부조벽(浮彫壁-2,700 * 9,270 * 600)
보조벽은 성벽도형으로써 시조께서 순절하신 927년을 상징, 폭은 9,270으로 하고 높이를 2,700으로 하며, 판재는 330*330 으로 하였으니, 3월3일과 9월9일을 상징하였다.

● 바닥판재
바닥판재 또한 330*330과 990*990으로 하여 춘·추 대제일(春·秋 大祭日)을 상징, 세세년년(歲歲年年) 영원토록 기원한 것 이며 전정(前庭)은 16,500*6,600이고 부조(浮彫)바닥은 12,870*7,920임.

시조동상 건립의 의의

고려 개국의 역사적 사실과 공산동수(公山桐藪)의 전사(戰史)는 1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의기순절(義旗殉節)의 표상(表象)으로, 애국충정(愛國忠精)의 사표(師表)로 고금(古今)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였지만 비교적 널리 국민에게 전수(傳受)되지 못한 체 크게 빛을 보지 못하여 안타까웠던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를 소재로 한 사극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재조명하게 되었거니와, 이로 인하여 정부 관계기관은 물론 절대 다수의 국민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성역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으니 우리 후손으로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통탄(痛嘆)타, 우리 70만 후손은 눈물 없이 어찌 그 옛날, 그 현장을 연상하리오. 대의(大義)를 위(爲)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리겠다는 그 위대한 의절(義節), 무수한 화살받이가 되신 처참한 순절(殉節), 두상(頭像)이 잘려진 비참한 그 모습, 피눈물을 뿌리며 복지통탄(伏地通嘆)치 않을 수 있으랴.

이에 우리 후손은 이 위대한 역사를 되새기고 처참한 순절을 위령하며 만고에 빛날 교훈을 담아 잃어 버린 두상(頭像)을 이 동상(銅像)에 모시어 천만년을 우러러 빕고 대대손손(代代孫孫) 인류와 함께 위령(慰靈)의 제단(祭壇)으로 모시어 숭모(崇慕)하며, 인류와 함께 영원토록 하고자 함이라.

이 위대한 시조(始祖)님의 피를 받은 우리 70만 후손들은 그 피를 뽑아 바치는 심정(心精)으로 헌성(獻誠)에 동참(同參)치 않으리오, 낙루(落淚)하며 복배(伏拜)하나이다.